(146)포은선생추석시圃隱先生秋夕詩 3수首

         포은선생추석시圃隱先生秋夕詩 3수首

                                                                            작자 :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번역 : 청계 조면희淸溪 趙冕熙

                                                                                                   출전 : <포은선생문집圃隱先生文集>



  1. (一)甲辰中秋有懷


    去年飮馬滄海頭。咸州客舍遇中秋。

    山川迢迢草木落。明月滿天淸景流。

    平沙萬幕寂無語。邊聲四起令人愁。


    將軍獨卧氊帳高。壯士悲歌鐵衣冷。

    帳前書生亦不眠。寂莫夜深相吊影。

    悄然興望望西南。浮雲橫空連鐵嶺。


    春風歸來計又非。扶蘇山前黃葉飛。

    今夜中秋去年月。去年客子猶未歸。

    庭除蕭索蟋蜶語。厨竈凄凉童僕飢。

    前朝舍弟附書至。白髮慈親願見之。

    功名富貴非汝事。客路年年有底期。

    明年何處逢明月。獨坐南囱自詠詩。

*해설 : 갑진년(1364년, 공민왕13년. 작자 28세) 추석날 감회를 읊음


지난해 국경수비차 바닷가에 머물다가
,

함주의 나그네로 추석을 맞이하였네.


멀고 먼 타향에는 초목 잎 떨어지고,

하늘에 꽉 찬 달은 깨끗한 빛 비췄지.


물가모래에 세운 막사들은 쓸쓸하기도 한데,

사방에 들려오는 적들의 소식 애를 태웠지.


장군은 높다란 털 장막 속에 홀로 누웠고

병사들은 철갑옷 차갑다 슬픈 노래 불렀지.


장막 앞엔 종사관인 서생도 잠을 못 자고

깊은 밤에 제 그림자 보며 서로 위로했네.


근심스레 일어나서 서남쪽을 바라다보니

머리 위에 뜬 구름은 철령 재에 닿았네.


봄바람 맞고 돌아가려던 계회 또 어긋나

부소산 앞에는 그 때 단풍잎만 날렸겠지.


오늘 밤 추석 달은 지난 해 그대로인데.

지난 해 나그네는 아직도 고향 못 갔네.


쌀쌀한 뜰 가에는 귀뚜라미가 지줄거리고

부엌이 텅텅 비어 어린 종은 굶주리겠지.


어제 아침에 보내온 아우의 편지에는

백발 어머니께서 보고 싶다고 하셨대.


부귀와 공명은 네가 할 일이 아닌데

언제를 기약해 객지 생활하려느냐고.


내년에는 어디서 밝은 추석 달을 볼 지

홀로 남쪽 창가에서 스스로 시를 읊네.


*형식 : 칠언고체장시七言古體長詩,


*운통韻通으로본 형식단락 : 하평성 우운尤韻, 상성 경운梗韻, 상평성 미운微韻. 3단락으로 되어 있음


*구절 풀이 : 지난해 국경수비차 바닷가에 머물다가, = 아래 약력을 보면 1363(작자 27세)년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으로 여진족(女眞族) 토벌에 참가하였으니 여기 바닷가와 함주는 함경도 함흥의 바닷가인 듯.


*7째 줄 바깥 구의 부소산으로 보아 당시 포은선생의 고향은 부여인 듯.

* 감상 : 이 시는 내용으로 보면 첫째 단락이 “지난 해 국경수비차-철갑옷 차갑다 슬픈 노래 불렀지‘까기로 벼슬길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선비로서 함경도 지방의 여진족의 반란을 평정하러 간 장수인 동북면도지휘사의 종사관이 되어 적군과 대치하고 있는 변방 객지에서 추석을 맞이한 심정을 마치 초한楚漢 전쟁 때 초패왕 항우項羽가 팔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해하성陔下城에 진을 치고 한나라와 마지막 결전을 할 때와 같은 분위기를 설정하였다. 그리고 둘째단락은 ’장군의 높다란 털 장막-단풍 날리겠지‘까지로 객지에서 고향을 그리는 정을 읊었으며, 셋째 단락은 ’오늘 밤-굶주리겠지‘까지로 이번 추석에도 벼슬길에 얽매어 고향을 가지 못하고 가난하게 사는 고향의 모습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그렸다. 넷째 단락은 ’어제 아침-생활하려고 하느냐고‘까지로 어머니의 부탁이고 마지막 두 줄이 다섯째 단락으로 불투명한 심정을 ’내년에는 어디서 추석을 맞이할지‘로 끝을 맞았다.


(二) 中秋


  1. 中秋昔作咸州客。屈指今經二十年。

    白首重來對明月。餘生看得幾回圓


*해설 : 추석


옛날에도 추석에 이 함흥의 나그네이었는데

지금 손가락 꼽아보니 이십년이 경과하였네.


백발로 다시 와서 밝은 달을 바라보며

남은 인생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지?


*형식 : 평기식칠언절구. 하평성 선先운.


*감상 : 윗글의 내용으로 보아 앞의 시를 지은 지 20년 후인 1383년(작자 47세)에는 작자가 동북면조전원수로서 함경도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하러 갔을 때 지은 것이 분명하다. 추석날 다시 이곳을 찾은 감회를 그리며 아직 47세의 나이에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저 추석 달을 볼 수 있을지를 걱정하는 것으로 보아 옛사람들이 오래 살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이 당시만 하여도 추석을 명절로는 취급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三) 侍中安邊樓詩韻次李

  1. 試問何人始起樓。登臨聊復爲淹留。

    十年道路負心事。百戰山河堪淚流。


    太守政聲淸似水。書生行色冷於秋。

    侍中過此題詩句。仰看沉吟未肯休.


*해설 : 이시중이 쓴 안변루 시에 차운함

--안변가학루의 현판에 걸린 고려 문하시중 이자송李子松의 시에 차운한 시는 앞의 145회 삼봉 정도전선생의 시에도 있었음.--


묻노니 누가 최초로 이 누각 지었는가?

그곳에 올라 어슬렁거리며 머물러 있네.


십년 동안 오가며 마음속에 간직했던 일은

백번 싸워 지킨 산하로써 눈물 절로 흐르네.


이곳 수령의 다스림은 물과 같이 깨끗하고

나 같은 서생의 행색은 가을처럼 쓸쓸하네.


높으신 시중께서 이곳에다 시구를 남겼기에

우러러 쳐다보며 쉬지 않고 읊조리고 있네.


*작자 소개 : 정몽주 [鄭夢周, 1337~1392]. 본관 연일(延日). 자 달가(達可). 호 포은(圃隱). 초명 몽란(夢蘭)·몽룡(夢龍). 시호 문충(文忠). 영천(永川)에서 태어났다. 1357년(공민왕 6) 감시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 예문검열(藝文檢閱)·수찬·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냈으며, 1363년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으로 여진족(女眞族) 토벌에 참가하고 1364년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이 되었다.


이어 전농시승(典農寺丞)·예조정랑 겸 성균박사(禮曹正郞兼成均博士)·성균사예(成均司藝)를 지냈고, 1371년 태상소경보문각응교 겸 성균직강(太常少卿寶文閣應敎兼成均直講) 등을 거쳐 성균사성(成均司成)에 올랐으며, 이듬해 정사(正使) 홍사범(洪師範)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1376년(우왕 2)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이인임(李仁任)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 언양(彦陽)에 유배, 이듬해 풀려나와 사신으로 일본 규슈[九州]의 장관에게 왜구의 단속을 청하여 응낙을 얻고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1379년 전공판서(典工判書)·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예의판서(禮儀判書)·예문관제학·전법판서·판도판서를 역임, 이듬해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이성계(李成桂) 휘하에서 왜구토벌에 참가하였다. 1383년 동북면조전원수로서 함경도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 다음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긴장상태에 있던 대명국교(對明國交)를 회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


1386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고 이듬해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수원군(水原君)에 책록되었다. 1389년(창왕 1) 예문관대제학·문하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고, 1390년(공양왕 2)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판사(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判事)·경영전영사(景靈殿領事)·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익양군충의백(益陽郡忠義伯)이 되었다.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높아지자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성계 일파를 숙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黃州)에 드러눕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방원(芳遠:太宗)의 기지로 실패, 이어 정세를 엿보려고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善竹矯)에서 방원의 부하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격살되었다.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라 사회윤리와 도덕의 합리화를 기하며 개성에 5부 학당(學堂)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꾀하는 한편 《대명률(大明律)》을 참작, 《신율(新律)》을 간행하여 법질서의 확립을 기하고 외교와 군사면에도 깊이 관여하여 국운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신흥세력인 이성계 일파의 손에 최후를 맞이하였다.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 〈단심가(丹心歌)〉 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1401년(태종 1) 영의정에 추증되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중종 때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1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포은집(圃隱集)》이 있다.

                                                                           ---두산백과사전 인용---

                                        汨羅江提供寫眞

by rkdmsaus | 2009/09/07 19:30 | 고인들의 시화 | 트랙백(1)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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