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고려말 학자 김구용선생의 시 3편

  1.             척약재선생시惕若齋先生詩 3편

                                    작자作者 : 김구용金九容

                                    번역飜譯 : 조면희趙冕熙

                    출전出典 : <척약재선생학음집惕若齋先生學吟集>


    (一) 신륵사무급두타지가타서시神勒寺無及頭陀之伽佗序詩

    丁巳八月庚午。自蘆灘放舟。順流而下。泊于神勒寺。有無及頭陀者。煮茗之餘出示伽佗二軸。乃江南禪子相贈之作也。無及。懶翁尙和高弟. 弟子早蒙印可。遂遠遊吳楚閩越之間。遍禮諸名師。尋探蘊奧。斂而東歸。去年夏。懶翁示寂于此。無及與其徒燒之。拾舍利頭骨安于北岡。造石鍾壓之。因以居焉。無及可謂不背其道而無負其師者矣。予甚嘉之。題詩卷末。以塞其請云爾

    *해설 : 정사년(우왕 3년, 1377년, 작자 40세) 8월 경오일(?)에 노탄에서 배를 타고 물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신륵사에 내렸는데 거기에 무급이라는 중이 있었다. 차를 달여 대접을 하고 이어서 불교 글[伽佗 : 諷誦의 뜻] 2축(軸 : 두루마리)을 보여 주었는데 바로 중국의 중이 지어준 작품이었다. 무급은 나옹화상의 수제자[高弟]로서 일찍이 제자로 인정을 받아 마침내 저 멀리 중국 강남지구인 오吳, 초楚, 민閩, 월越 등지에 노닐면서 유명한 여러 스승들을 예로 찾아보고 깊은 교리를 배운 뒤에 돌아왔다. 지난여름에 나옹이 이 절에서 죽자 무급이 그 제자들과 함께 화장을 하고 나옹의 사리와 두골을 북쪽 언덕 위에 안치한 뒤에 석종을 만들어 그 위를 덮은 뒤에 이곳에 거주하게 되었으니 무급은 전해 받은 도와 그 스승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하겠다. 나는 그러한 것을 매우 갸륵히 여겨 그 가타의 끝에 이시를 써 넣어 그가 바라던 바를 메웠다.


    *맨 앞의 ‘신륵사무급두타지가타서시’는 번역자가 제목으로 요약한 것임


    *懶翁尙和高弟. 弟子早蒙印可 : '나옹화상 수제자의 제자로서 일찍이 인정을 받아' 로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앞뒤 문장을 보아 나옹화상의 제자로 풀이했음.

    拃棹回蘆瀨。松舟繫石矼。

    煙霞光杳杳。鍾鼓響摐摐。

    古寺亭臺好。居僧鬢髮厖。

    拂衣遊上國。颻錫訪南邦。

    彼佛心難見。渠僧道少雙。

    淸風吹老樹。明月滿長江。

    說法龍應聽。參禪鬼自降。

    往來幽興熟。苔徑接蓬窓。


    노를 저어 노탄 여울로 돌아 내려와

    소나무로 엮은 배 바윗돌에 매었네.


    아름다운 경치 널찍이 펼쳐 있고

    종소리 북소리 우람하게 들려오네.


    옛날절의 정자와 누각 보기 좋은데

    그곳 중들 수염과 털이 더부룩하네.


    옷깃 펄럭이며 중국에 노닐었고

    지팡이 날리며 남쪽나라 찾았지.


    이 사람 불심은 알아내기 어렵지만

    그가 닦은 도는 짝할 사람이 적네.


    맑은 바람은 늙은 나무를 흔들고

    밝은 달은 긴 강물위에 가득하네.


    설법할 땐 용도 응당히 와서 듣고

    참선할 땐 귀신도 절로 감복하리.


    오다가다 그윽한 흥치 무르익는 차에

    이끼 자란 길은 배까지 이어져 있네.


    (二) 신축년홍적2수辛丑年紅賊二首


    1.

    豺虎陷京國。群臣摠不知。

    蒼黃失妻子。顚倒棄嬰兒。

    煙焰衝雲起。山河滿目悲。

    金湯已未守。奔走欲何之。


    2,

    豈謂吾生苦。深嗟不後先。

    千年文物地。一日犬羊天。

    民庶登山上。君王走海邊。

    誰能莫愛死。回首淚潸然.


    *해설 : 신축년(공민왕 10년, 1361년, 작자 34세)에 홍건적 난리에 대한 시 2수


    1.

    늑대같은 무리 수도를 짓밟았으나

    여러 신하들은 모두 알지도 못했네.


    당황하여 아내와 자식도 잃어버렸고

    넘어지고 자빠지며 어린애도 버렸네.


    화약연기 구름처럼 솟아오르고,

    산과 물은 슬픔으로 가득 찼네.


    견고한 성곽도 이미 빼앗겼으니

    달아난들 어디로 간단 말인가?


    2.

    우리 인생의 고통을 어찌 다 말하리,

    너무도 슬프구나, 누구도 빠짐없다네.


    천년 동안 문화가 발전된 곳이었는데

    하루 아침에 개나 양의 나라가 되었네.


    서민들은 산위로 도망가고,

    임금은 바닷가로 달려갔네.


    누군들 죽음이 아깝지 않을까?

    뒤돌아 보니 눈물만 흘러내리네.


    (三) 면청선유후시面聽宣喩後詩

    癸丑四月。自大倉召至京師。賜宴光祿寺。奉天門下面聽宣喩。復用前韻。


    胥餘國。來觀上國光。

    骨醺光祿酒。身惹御爐香。

    威振乾坤整。恩深日月長。

    政刑俱以德。北極在中


    *해설 : 직접 왕명을 듣고 쓴 시
    (이 시의 제목이 길어 번역자가 임의로 줄인 제목)

    계축년(1373년. 공민왕 22년, 작자 36세) 4월 중국 대창에서 경사(지금 남경, 명나라 초기 수도)으로 불려 가니 광록사에서 잔치를 베풀어주고 봉천문 아래서 명나라 왕이 직접 지시하는 말[宣喩]를 들었다. 그리하여 앞서 쓴 운을 가지고 이시를 지음.


    멀리 기자의 나라[胥餘國]으로 부터

    중국의 문물을 와서 보았네.


    정신은 광록사의 술에 취했고,

    몸은 어로의 향불에 이끌렸네.


    위엄은 떨치어 온 세상 정돈하고

    은혜는 깊어 오랜 세월 영원하리.


    정치와 형벌은 모두 덕으로써 하니,

    북극 같은 왕권이 중앙에 자리하리.


    *이글의 문제점들

    1.제목과 순서 : 이글은 작자가 당시 중국의 신흥국으로 남쪽에서 성장하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지은 것으로 이글의 제목이 길기 때문에 ‘면청선유후시’로 줄였으며 앞서운을 다시 썼다고 하는데 원문의 앞선운이 5편 앞에 ‘사연賜宴’이라는 시가 같은 운이며 내용으로 보아도 면나라 왕이 ‘잔치를 베푼대 대한 시로 같은 연대에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문집을 간행할 당시 편집을 잘 못 한 듯,

    2. 오자 : 이시의 첫 줄의 ‘自’는 원문에 ‘目’으로 쓰였는데 오탈자일 듯하여 바꾸었고 또 ‘사연’ 시의 끝 운자가 ‘央’이 틀림없는데 ‘史’로 쓰여서 바꾸었음


    *낱말

    1. 서여국胥餘國 : 서여는 일설에 기자箕子의 이름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 비간比干의 이름이라고 함. 출전 : <장자, 대종편莊子, 大宗師>

    2.광록사光祿寺 : 타국 손님을 접데하는 국가 기관


    *이시 앞에 쓴시로 추정되는 시

           賜宴(口號)

    喜氣排寒氣。天朝德業光。

    絃歌含古律。肴酒噀淸香。

    雨露恩初重。風雲慶更長。

    醉扶街上路。歡樂未渠


    *홍건적의 난(紅巾賊-亂) : 중국 원(元)나라 말기에 일어난 한족(漢族)의 농민반란. 머리에 붉은 두건을 둘렀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며, 홍두적(紅頭賊)·홍적(紅賊)이라고도 한다.

    이 반란은 이민족 왕조인 원나라를 쓰러뜨리고 한족 왕조인 명(明)나라를 성립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미륵(彌勒)·백련(白蓮) 양교도들이 일으켰는데, 원래 이 양교단은 별개로 발생하였으나 원나라 말기에 혼합되어행동하게 되었고, 그 뒤 백련교에 통합되었다.

    허베이성〔河北省〕 영년현(永年縣)의 한산동(韓山童)은 스스로 미륵불의 환생이라는 설을 퍼뜨려 허난河南〕·안후이〔安徽〕에 많은 신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1351년 황허강〔黃河〕 수리(水利)를 위한 노역부 징발문제로민심이 동요한 틈을 타서 난을 일으켰다.

    홍건적은 최초의 진압 때 한산동을 잃었으나, 유복통(劉福通) 등은 그의 아들 임아(林兒)를 받들어 우두머리로 삼고 안후이에서 송(宋)이라는 국호를 내걸고 전국에 격문을 보냈다.

    이에 후베이〔湖北〕의 서수휘(徐壽輝), 안후이의 곽자흥(郭子興)·주원장(朱元璋), 허난의 북쇄홍건(北鎖紅巾), 후베이의 남쇄홍건 등이 호응하였지만 내부 분열로 인해 비적으로 전락되었으며 관군 향토자위군의 반격으로 괴멸되었다. 다만 주원장만 천하를 평정하여 명나라를 창건하였다. --인터넷에서 인용--


    홍건적의 고려 침입

    홍건적의 잔당 일부가 만주(滿州)로 북진하여 랴오둥〔遼東〕지방을 점령하였다가 원의 반격에 쫓겨 곤경에처하자 고려를 침범하였다.

    1359년(공민왕 8) 12월 홍건적의 장군 모거경(毛居敬) 등은 4만의 군사를 이끌고 내침, 의주(義州)·정주(靜州)·인주(麟州)·철주(鐵州)가 함락되고 마침내 서경(西京)·평양도 함락되었다.

    고려는 이에 맞서 이승경(李承慶)을 도원수로 삼아 이듬해 1월 2만 명의 군사로 서경을 공격하여 탈환하였으며 2월에는 정주·함종(咸從)·안주(安州)·철주 등지에서 섬멸하여 압록강(鴨綠江) 이북으로 모두 몰아내었다.

    그 뒤 홍건적은 수군을 동원하여 황해도·평안도의 해안지대를 노략질하다가 61년 10월 반성(潘誠)·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주원수(朱元帥) 등이 10만의 무리를 이끌고 다시 고려를 침범하였다. 이들은 지금의 자비령(慈悲嶺) 방책을 부수고 개경(開京;開城)으로 진군하자 공민왕은 복주(福州;安東)로 피하였으며 개경은 함락되었다.

    그해 12월 고려는 복주에서 군사를 정비하여 정세운(鄭世雲)을 총병관으로 적을 막게 하는 동시에, 각 도에서 20만 명의 군사를 모아 안우(安祐)를 상원수(上元帥)로 삼아 개경을 탈환하도록 하였다. 다음해 1월 고려군은 개경에 진공하여 적을 대파하고 사유·관선생 등을 죽임으로써 홍건적은 압록강 건너로 모두 퇴각하였다.

    이때 동북면(東北面) 상만호(上萬戶)이던 이성계(李成桂)는 휘하 2000명을 이끌고 선봉에서 싸워 큰 공을 세웠다. 이 전란으로 고려도 큰 타격을 입고 왕권이 약화되었지만 홍건적은 거의 전멸상태에 빠졌으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는 계기가 되었다.

                                                                      ---인터넷에서 인용--


    *작자소개 : 김구용金九容{1338, 충숙왕 복위 7~1384.우왕 10}. 고려 말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경지(敬之), 호는 척약재(惕若齋). 첨의중찬 방경(方慶)의 현손이며, 상락군(上洛君) 묘(昴)의 아들이다.

    16세에 진사가 되고, 18세에 등제하여 덕령부주부를 지냈다. 1367년(공민왕 16) 성균관이 중건되고 나서 민부의랑(民部議郞) 겸 성균직강(成均直講)이 되어, 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성리학을 일으키고 척불숭유(斥佛崇儒)에 앞장섰다. 1371년에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승진되어 명나라에 하정사(賀正使)로 갔다왔으며, 1375년(우왕 1) 삼사좌윤(三司左尹)으로 있을 때, 정도전 등과 함께 북원(北元)에서 온 사신의 영접을 반대하여 죽주(竹州)로 귀양갔다. 1381년 풀려나와 좌사의대부, 이듬해 대사성·판전교시사가 되었다.

    우왕대에 북원과 수교를 재개함에 따라 대명관계는 악화되었다. 이후 명은 고려에 사신을 파견하지 않고 요동을 차단하여 고려 사신을 구금하는 사건이 여러 번 있었다. 1384년 행례사(行禮使)로 요동 통과를 시도하다 체포되어 난징[南京]으로 압송되었다. 명 태조의 명으로 대리위(大理衛)에 유배되던 도중 영녕현(永寧縣)에서 병으로 죽었다.

    시가와 문장에 뛰어났다. 이색(李穡)은 그의 시를 가리켜 "붓을 대면 구름이나 연기처럼 뭉게뭉게 시가 피어나온다"고 했다. 〈동문선〉에 그의 시 8편이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 특히 무창시(武昌詩)가 유명하다. 저서에 〈척약재집〉이 있다.

                                                     ---인터넷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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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인의 14대 조 화천공 휘 즙이 1623년 인조 1년 동지성절사의 정사로 북경에 다녀온 기행문 및 당시 인조반정에 대한 인준을 받기 위해 먼저 중국에 들어가서 거의 1년동안 체류하던 사신들과 동서관에 나누어 유숙하며 수창한 시를 모은 수창시를 합해 연행수창록을 한글로 번역하여 제목을 <뱃길로간 북경기행 및수창시>로 한 책을 만들고 또 17세기 우리 고어로 번역된 사행일기가 국립도서관에 있어서 그것을 영인하고 또 원문을 모두 실은 한문본 <조천일승 및 연행수창록> 한책을 엮어 모두 2책을 비매품으로 번역 발간하였음. 발간 연도 2004년. 국내 각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고 본인의 초서연구 홈페이지의 <고전 번역작품> 난에 실려 있음.           

     

 

by rkdmsaus | 2009/09/20 14:55 | 고인들의 시화 | 트랙백(1)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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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草書 맟 漢詩硏究 : http://www.choseo.pe.kr/tt.htm

* 淸溪子 詩文 : http://blog.daum.net/whausgml

*. 先人들의 詩文 : http://blog.empas.com/cmh1022

*. 本人 著書 紹介 : http://blog.naver.com/rkdmsaus

*. 臺灣詩人과의 交遊記 : http://kr.blog.yahoo.com/cmh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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