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22일
(164)운곡원천석선생시耘谷元天錫先生詩 몇 수
운곡선생시耘谷先生詩 몇 수
작자 : 운곡 원천석耘谷 元天錫
번역 : 청계 조면희淸溪 趙冕熙
출전 : <운곡행록耘谷行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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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곡 원천석선생은 고려 말의 선비로서 고향인 원주를 중심으로 22세에 이미 금강산을 구경하고 31세에 사마시에 급제한 뒤에 대과大科는 급제하지 못하고 유학자와 승려들을 두루 사귀며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하였던 것 같다. 그분의 문집인 <운곡행록>에는 다른 글은 별로 없고 그분이 22세에서부터 65세까지 연도별로 쓴 시詩가 본인이 세어보지 않았지만 전부 5권에 수백 편은 될 것 같다.
그런데 본인이 그 시를 전부는 읽어보지 못하였지만 제목이나 시의 내용을 보면 세상에 불평을 품고 숨어살려는 뜻은 보이지 않고 마치 공자님이 ‘불가여조수동군不可與鳥獸同群’이라하며 뜻을 펴기 위하여 열심히 다닌 흔적을 느낄 수가 있다. 곧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여 그렇지 나갈 기회를 주면 소신을 펴며 살고 싶어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현실 정치에 대한 불만은 털어놓은 것을 볼 수가 없다. 말하자면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며 살아가려고 한 것 같다.
특히 선유들이 고려 말 임금인 우왕 창왕 부자의 폐위위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에서 표현한 것으로 보았으나 본인은 문리가 부족하여 그런지 몰라도 그 자체의 글로 보면 폐위를 당연시한 것으로 해석된다.
또 그뿐 아니라 이씨 조선이 개국되었을 때 여말삼은麗末三隱처럼 일부러 숨어 살았다고 알려졌으나 이분은 이씨조선이 개국한 해인 1392년에는 이미 나이가 63세이니 본래부터 한 사람의 진사로서 벼슬이 없던 사람인데 새삼 벼슬할 나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숨어살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이것은 중국황제가 국호國號를 조선이라고 명명한 데 대하여 찬양한 것을 보아도 새 왕조를 거부하려는 뜻은 전혀 없었다.
작자는 현실 정치에서 지방 관리의 부패상을 25세의 나이에 이미 고발한 바가 있다. 여기 제일 먼저 올리는 양구지방 백성들의 참상이 그것이다. 31세 이후에는 함께 급제한 동년同年들과의 교류가 많았는데 이것으로 보아도 이분은 대과에 급제하려고 많이 노력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분의 동년으로 삼봉 정도전선생과 도은 이숭인선생과의 주고받은 시가 있는데 삼봉선생은 1337년생이고 도은선생은 1347년 생으로 되어 있으니 이 운곡선생은 1330년생으로 이분이 31세 떼인 1360년에 진사시험에 합격하였는데 그렇다면 삼봉선생은 당시 24세이고 도은선생은 12세밖에 되지 않는다. 아마도 도은 선생의 출생연도가 잘 못 알려진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또 운곡선생의 시는 제목이 거의 길기 때문에 긴 제목은 본인이 우선 몇 자로 줄여서 앞에 쓰고 나머지 제목은 그 다음에 그대로 옮겼으며, 한 해의 연도를 쓴 다음 그해에 쓴 시는 모두 연도가 빠졌는데 여기 뽑아 올린 시는 그 연도를 일부러 넣었음.
<一> 양구이민참상楊口吏民慘狀
甲午十月十五日。發方山到楊口郡。吏民家戶欹斜倒地。寂無煙火。問諸行路。答曰。此邑乃狼川郡之兼領官也。自古地窄田磽。民物凋殘。比來權勢之家奪有其田土。擾亂其人民。租稅至多。雖容足立錐之地。無有空閑。每當冬月。收租徵斂之輩塡門不已。一有不能則高懸手足。加之以杖。剝及肌骨。居民不堪。流移失所。故如斯也。予聞其語。作五言八句。以著衰亡之實云。
破屋鳥相呼。民逃吏亦無。
每年加弊瘼。何日得歡娛。
田屬權豪宅。門連暴虐徒。
孑遺殊可惜。辛苦竟何辜.
*해설 : 양구지방의 백성과 관리들의 참담한 모습
갑오년(1354년, 작자 25세) 10월 5일에 방산方山을 떠나 양구군에 이르니, 백성들과 아전들의 집들이 이리저리 쓰러지고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길가는 사람에게 물으니 답하기를 ‘이 고을은 바로 낭산군이 겸하여 다스리는 관청인데 예로부터 땅은 좁고 밭이 메말라서 물자가 빈약한데다가 근래에 권세를 가진 집안에서 이곳의 땅을 모두 빼앗아 백성들을 괴롭히고, 게다가 세금이 너무 많아 손바닥만 하든지 송곳을 세울 만한 땅도 다 세금을 매겨 매년 겨울이 되면 세금을 거두는 무리들이 문이 메이도록 드나들고 만일에 한 가지라도 내지 않으면 손발을 묶어 매어달고 매를 치며 살가죽까지 베껴가니 백성이 견디지 못하여 모두 떠났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오’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다섯 자씩 여덟 구의 시 한 수를 지어 쇠약해지고 망하여 가는 현실을 표현하였다.
무너진 집에는 까마귀만 서로 울부짖고
백성이 도망가니 관리도 또한 없어졌네.
매년 못 살게 하는 폐단만 더하니,
언제 좋은 때를 기다린단 말인가?
밭은 권세 가진 집안에서 붙이고,
문엔 포악한 무리들이 연이었네.
불쌍한 백성들이 너무나 안타깝구나.
노력한 것밖에 무슨 허물 있단 말가?
<二> 송별送別詩
乙未秋七月有日。春城金,安二生罷課還鄕。諸生作詩送別。得秋字。
春城二子舊知音。來自昭陽江水頭。
佋陽乃我舊游地。柳堤花塢多風流。
往事如煙歲月變。山水蒼茫雲正秋。
講席將闌二子去。浩然歸志難挽留。
送君此行意無極。別酒一杯君勿休。
佋陽江水好在否。說我相思千斛愁。
*해설 : 송별시
을미년(1355년, 26세) 7월 일. 춘천[春城]에 사는 김, 안 두 학생(과거시험 준비를 위한 향교의 학생인 듯)이 공부를 그만 두고 고향에 돌아간다고 하므로 여러 학생들이 시를 지어 송별하였는데 나는 ‘추秋’자 운을 받아서 지었다.
춘성의 두 사람 오랜 친구인데
소양강의 상류 쪽에서 왔다네.
소양은 바로 내가 오래전에 노닐던 곳
버들 언덕, 꽃동산들 멋진 곳도 많았지.
지난 일 연기처럼 사라지고 세월 바뀌어
산수는 창망한 구름으로 싸인 가을일세.
한창 공부하는 자리에 두 학생이 떠나니,
미련 없이 떠나려는 뜻을 붙잡기 어렵네.
이렇게 그대를 보내는 마음 끝이 없으니
이별주 한 잔만은 사양하지 말고 받게나.
소양강 물은 지금도 예와 같이 잘 있는지?
나의 그리움은 천 동이의 근심이 되었다오.
*감상 : 아마도 이 시는 6 명의 학생이 각자 한 줄씩 쓴 것으로 하평성 ‘우尤’자 운모를 가지고 각자 한 운만 맞추었을 뿐 평측도 대구對句도 모두 맞지 않음. 원곡 선생은 세 번째 ‘추秋’ 운을 받아 시를 지은 듯. 그리고 이 글로 보면 이 때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하여 학생들이 고향집을 떠나 향교 같은 데서 공부를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음.
<三> 차동년정도전운次同年鄭道傳韻
庚子年十二月十七日。同年鄭道傳到此贈予詩云。同年元君在原州。行路不平山谷深。客子遠來已下馬。朔風蕭蕭西日沈。一笑欣然有幽意。尊酒亦復論是心。我唱高歌君且舞。榮辱自我已難諶。次韻以謝。
與君同榜如隔晨。交道不復論淺深。
各以事牽在兩地。逢人細問浮與沈。
今朝邂逅天攸使。開尊且喜細論心。
公乎公乎莫催轡。此意自重誠之諶。
*해설 : 동년인 정도전의 시에 차운함
경자년(1360년. 작자 31세) 12월 17일에 동년(同年 : 급제 동기생) 정도전이 이곳에 이르러 나에게 시를 주었는데 거기에 쓰이기를 ‘동년 원군이 원주에 살지만/길도 평탄하지 않고 산골짜기도 깊네./나그네 먼 곳에서 와 말에서 내렸는데,/겨울바람 쌀쌀하고 해는 서산에 넘어가네./ 한 바탕 웃음 속에 깊은 뜻 숨어 있어,/한 동이 술로 이 마음을 털어 놓았네./ 나는 고상한 노래 부를 터이니 그대는 춤을 추게나,/ 영화와 욕됨은 나 스스로도 이미 믿기 어렵게 되었네.’ 하였는데 나는 여기에 차운하였다.
그대와 함께 급제한 일이 어제 같으니,
우리 사귐의 깊고 옅음은 따지지 말세.
각각 하는 일 때문에 다른 곳에 살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그대의 안부 묻는다네.
오늘 아침에 만남은 하늘이 시킨 바이니,
술동이 앞에서 마음을 터놓아 기쁘다네.
공이여 말고삐 재촉해 빨리 떠나지 말게,
이 마음 실로 진실함을 중하게 여기게나.
*이때 작자는 31세이고 정도전은 24세임.
<四> 전왕폐위前王廢位
聞(己巳年)今月十五日。國家以定昌君立王位。前王父子。以爲辛旽子孫。廢爲庶人。
前王父子各分離。萬里東西天一涯。
可使一身爲庶類。正名千古不遷移。
祖王信誓應乎天。餘澤流傳數百年。
分揀假眞何不早。彼蒼之鑑照明然。
*해설 : 전왕의 폐위
듣자니 이달 15일(기사년 : 1389년. 작자 60세), 나라에서는 정창군을 왕위에 앉히고 전왕의 부자(우왕, 창왕)를 신돈의 자손이라고 하여 폐위시켜 서인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전왕의 부자는 각자 헤어져서
동서 만리 헤어져서 살게 됐네.
만일 그 사람이 서민의 무리이었다면
바른 명분은 천고에 바뀌지 않았으리.
시조왕의 믿음과 맹서 하늘의 감응 받아
그 은혜는 수백 년 동안 흘러내려 왔으리.
진짜인지 가짜인지 왜 일찍 못 밝혔을까?
저 하늘의 바라봄은 밝고 분명하였으리.
<五> 전왕부자사사前王父子賜死
國有令。以前王父子賜死。(己巳年)
位高鍾鼎是君恩。反自含讎已滅門。
一國必應流景祚。九原難可雪幽冤。
古風淪喪時還泰。新法淸平道益尊。
專向玉墀呼萬歲。願施優渥及山村。
*해설 : 전왕 부자의 사형
나라의 명령으로 전왕의 부자가 죽음을 당함(1389년 작자 60세)
지위가 높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은 임금의 은혜.
도리어 원수를 품었다가 결국 멸문의 화를 당했네.
한 나라는 반드시 큰 운명이 흘러내려 오는 것
저승에서도 깊이 박힌 원통함을 갚을 수 없으리.
옛 풍속은 잃어버렸으나 시절은 도리어 태평하고
새로운 법은 투명하고 공평해 도덕을 더욱 높였네.
모두들 궁궐을 향하여 만세를 부르짖으니
바라건대 넉넉한 혜택 산골까지 입히소서.
*위의 두 개의 시를 두고 조선 시대의 학자들은 운곡선생이 고려의 우왕 창왕 부자가 왕씨 자손인데 애매하게도 신돈의 자식으로 몰려 죽음을 당하였다는 고발성의 뜻이 숨어 있다고 하였는데 본인은 이 글만 두고 볼 때 고발적 낌새를 느낄 수가 없다. 오히려 신돈의 자손이므로 폐위가 됨이 당연하고 또 그들을 죽임으로써 국운이 창궐하기를 바라는 뜻이 나타났다고 보겠다. 물론 이 외의 다른 어떤 글의 내용에 태조 이성계의 횡포를 비판한 내용이 있는지는 자세히 연구해 보지 않아서 모르겠으나 단순히 이 두 시만 가지고는 그렇게 평할 수 없다는 뜻이다.
첫째 수 폐위에 대한 시의 마지막 구는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왜 일찍 못하고 시조왕의 음덕으로 지금이라도 가짜를 물리쳤음이 다행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또 둘째 수 첫째 구(位高鍾鼎是君恩。反自含讎已滅門)는 (신돈이?) 임금의 사랑을 받아 지위가 높고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도리어 나라에 적개심을 품었다가 멸문의 화를 당하였다고 하고 이어서 나라의 운명은 크게 발전 되지만 저승에 간 그들의 원한이야 다시 복수할 수가 없을 것이다. 라고 하고 잠시 옛날 풍속은 몰락한 때가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도리어 태평하게 될 터이니 나라를 향하여 만세를 부르고 그 은택은 이 산골까지 미치기를 빌었다고 볼 수 있다. 반대로 이 구절을 신돈으로 보지 않고 이태조 이성계로 본다면 (이성계는)지위가 높은 것이 모두 임금의 은혜이거늘 도리어 원수 같은 마음을 품어 우왕부자를 멸문 시켰다. 그렇게 보면 이성계가 높은 지위를 이용하여 우왕부자를 신돈의 자손으로 몰아 죽였으나 고려 국운은 더욱 발전할 것이라는 뜻으로 되니 앞뒤가 모순이 된다.
그래서 이글만 가지고 본시의 내용만 가지고 보면 우왕 창왕이 쫓겨나고 죽은 것이 당연하고 오히려 늦었다고 한탄한 듯하다.
<六> 차동년이영공운次同年李令公韻
庚午年同年李令公 崇仁。被讒在忠州寄詩云。宦海連三黜。羈棲已屢空。問誰能感激。北望有元公。次韻奉答。
單棲淸且冷。束手愧不空。
但願安眠食。明君道至公。
*해설 : 급제 동기인 이영공의 운에 차운함
경오년(1390년, 작자 61세 회갑년,)에 급제동기인 이숭인 영감[令公]이 참소를 받아 충주에서 귀양생활을 하는 도중에 시를 보내 왔는데 거기 이르기를 ‘어려운 벼슬길에 3번이나 쫓겨나/ 귀양 터에서 벌써 여러 번 가난에 시달렸네./ 묻노니, 누가 내 처지를 이해해 줄 것인가?/북쪽으로 원공이 있는 곳을 바라보네.’ 하였으므로 그 운에 맞추어 답시를 보냄.
홀가분한 몸으로 청빈하고 쓸쓸하게 살지만
가난을 도와 줄 방법 없음이 부끄럽소이다.
다만 바라기는 잠자고 먹는 일을 편히 하면
그대의 도가 지극히 공정함이 밝혀질 것이오.
*이숭인선생은 출생 연도를 찾아보니 1349년이었다. 그렇다면 운곡선생보다 19살 차이이니 같이 진사시험에 합격한 급제 동기라면 이숭인선생의 당시 나이는 12세밖에 되지 않는다. 12세의 나이에 진사시험을 치도록 하는 제도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七> 생일유감生日有感
庚午七月八日有感 是予生日
身年六十一。今日是生日。
膽落心如灰。鬢衰顏似漆。
持身何苦辛。絶念於超逸。
兄弟共違行。妻孥不在室。
親恩何以酬。子職尤多失。
念此撫孤松。悲風起蕭瑟。
*해설 : 생일에 느낌이 있어
경오년(1390년) 7월 8일은 바로 나의 생일이므로 느낌이 있어서 씀
내 나이 육십 한 살인데
오늘이 곧 태어난 날일세.
겁만 많아 마음은 재처럼 되었고
귀밑털은 빠지고 얼굴은 검어졌네.
몸가짐을 얼마나 노력하였던가?
고상하게 살려는 생각은 버렸네.
형제들도 모두 갈 길이 어긋났고
아내와 종도 집에 함께 살지 않네.
어버이 은혜를 어찌 다 갚을쏜가?
자식 된 직분을 더욱 많이 잃었네.
외로운 소나무 쓰다듬으며 거니니,
안타까운 기운만 쓸쓸이 일어나네.
*운곡선생의 업적은 역사상에는 잘 나타나지 않았으나 자신이 쓴 시로써 출생연월일을 분명히 밝히었다. 그리하여 운곡의 시는 <운곡시사耘谷詩史>라는 명칭으로 전하여 왔었다.
<八> 계유개신국호위조선癸酉改新國號爲朝鮮
王家事業便成塵。依舊山河國號新。
雲物不隨人事變。尙令閑客暗傷神。
恭惟天子重東方。命號朝鮮理適當。
箕子遺風將復振。必應諸夏競觀光。
*해설 : 계유년(1393년) 새 나라의 이름을 조선이라고 했음
왕씨의 국가 운명은 마침내 티끌이 됐지만
예와 같은 산과 물엔 국호가 새로 바뀌었네.
구름 같은 자연은 사람 따라 변치 않지만
그래도 한가로운 나그네 슬픔을 자아내네.
삼가 생각건대 천자께서 우리나라 중히 여겨
조선이라는 국호 내려 주니 합당한 이름일세.
옛날 기자가 남겨진 풍속 다시 떨쳐 일어나면
반드시 중국 천지에서도 다투어 우러러 보리.
*중국 천자로부터 조선이라는 국호를 인준 받은 것을 찬양한 시임.
*아래 운곡선생의 약력은 인터넷 백과사전에서 인용하여 온 것인데 그 내용을 보면 고려 정치의 문란함을 보고 개탄하여 벼슬을 그만 두었다고 하고 또 이조 태종의 스승으로 태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 여러 번 불렀다고 하는데 이러한 것을 짐작할 만한 시는 아무데도 찾을 수가 없다. 내용을 보면 현실 정치의 일선에서 일하고 있는 여러 진사급제 동기생들과 교류하며 많은 시를 남긴 것으로 볼 때 숨어 사려는 의도는 나타난 데가 없다. 본인이 볼 때 운수가 없어 대과에 급제를 못하여 그냥 시골에서 숨어 살았을 뿐이라고 보인다. 이와 같이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대과급제를 못하여 음직蔭職으로 벼슬을 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산림에 묻혀 후진을 가르친 사람은 이조 시대에도 여럿이 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연암선생이나 남명선생을 손꼽을 수 있다. 이분들은 모두 재주는 있으나 불운하여 과거에 급제하지 못함으로 어쩔 수 없이 처사 노릇을 하든지 또는 음관으로 작은 출세밖에 못하였다.
*원천석 (元天錫 1330∼?(고려 충숙왕 17...)
고려 말 조선 초 은사(隱士). 자는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 본관은 원주(原州). 정용별장을 지낸 열(悅)의 손자이며 종부시령을 지낸 윤적(允迪)의 아들로, 원주원씨의 중시조이다. 진사가 되었으나, 고려 말 정치의 문란함을 보고 개탄하여 치악산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봉양하고 이색(李穡) 등과 교유하며 지냈다. 일찍이 왕자시절의 태종을 가르친 바 있어 태종이 즉위 후 그를 기용하려 불렀으나 응하지 않아 집으로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했다. 이에 태종은 계석(溪石)에 올라 집 지키는 할머니에게 선물을 주고 그의 아들 형을 현감에 임명했는데, 이 계석을 태종대라고 한다. 《운곡시사(耘谷詩史)》에 실려 있는 회고시 등을 통해서, 그가 끝내 출사하지 않은 것은 고려왕조에 대한 충의심 때문인 것을 알 수 있다. 야사 6권을 저술하였으나 국사와 저촉되는 점이 많아 증손대에 이르러 불태워졌다. 강원도 원주의 칠봉서원에 제향되었다.
--인터넷 백과사전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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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臺灣詩人과의 交遊記 : http://kr.blog.yahoo.com/cmh1022
* 淸溪子 詩文 : http://blog.daum.net/whausgml
* 草書 맟 漢詩硏究 : http://www.choseo.pe.kr/tt.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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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本人 著書 紹介 : http://blog.naver.com/rkdmsaus
# by | 2009/10/22 10:20 | 고인들의 시화 | 트랙백(1)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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