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28일
(165)운곡행록과 광문의 신드롬
운곡행록과 광문의 신드롬
필자 : 청계 조면희
저자 조면희 지음 출판사 현암사 펴냄 2001.12.10 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 다섯 이야기와 최치원의 작품 하나를 수록한 책. 고전 작품에 대한 대중화를 위해, 한문으로 된 문...
광문은 연암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다. 광문은 청계천 수표교 아래서 거지 생활을 하다가 집단 따돌림을 받고 쫓겨났다. 그는 밤에 추위를 피하려고 남의 집 헛간으로 숨어들어 갔다가 도둑으로 몰렸는데 도둑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 주인은 그를 약방의 심부름꾼으로 취직을 시켜 주었다. 그는 여기서도 도둑의 의심을 받다가 그가 정직한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진 뒤로 이 사실이 온 장안에 퍼지면서 그의 정직성은 마침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지고 커져서 고관대작의 안방이나 유흥업소의 기생들의 입에까지 오르내렸다. 급기야 장안의 일등 기생은 임금의 사위인 부마도위보다 광문을 위하여 춤을 추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증후군症候群을 나는 광문신드롬이라고 부르고 싶다.
운곡선생의 일화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보아야하지 않을까? 처음에는 이조개국 이후 선비와 선비들 사이에 한 개의 조그마한 에피소드로 떠돌다가 이것이 점점 발전하여 나아갔으나 이 이야기는 새 왕조王朝의 개국 정당성에 저촉되므로 아마도 쉬쉬하며 퍼져나갔을 것이다. 그 뒤 200여 년의 세월이 지나고 임진왜란이라는 외세의 침략을 받아 왕가의 권위도 추락해 지고 또 개국이후 강력한 후원자인 명나라의 세력도 한꺼번에 쇠약해지니 사람들은 전왕조의 패망 이면의 베일을 벗겨 보고 싶었다. 그래서 당시 강원도 관찰사로 갔던 박동량朴東亮이 운곡선생의 후손을 찾아가서 그동안 깊이 소장되어 있던 유고遺稿를 찾게 되었다. 그런데 소장본은 운곡선생이 평생 동안 연대를 적어가며 시간 순으로 쓴 시책詩冊뿐이었다. 그는 이것을 가지고 관아에 와서 <운곡시사耘谷詩史>라는 제목으로 발간하였다. 이때가 1603년이었다.
박동량은 이 책의 서문 첫머리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嘗聞原州人元天錫在麗末隱居著書。言禑,昌父子非辛出事甚悉。逮我朝。閉門終身。其淸風峻節。直可與圃,冶諸公相伯仲。而子孫祕其書久益密。人無得以見者。幷與其名遂泯泯不傳於世。後二百年。余按節到是州。適得其所爲詩耘谷集。雖所紀不多。與向所聞異。要之不失爲特筆也… : 일찍이 듣자니 ‘원주 사람 원천석은 고려 말에 숨어 살며 책을 썼는데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소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매우 자세히 썼으나 우리 왕조가 개국하자 문을 닫고 일생을 맞쳤으니, 그 맑은 기풍과 높은 절개는 바로 포은과 야은 같은 여러 학자와 견줄 만하다. 그러나 그 자손이 오래도록 그 저서를 비밀이 간직하여 그것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의 이름과 저서가 동시에 세상에 전하지 않고 없어지고 말았다.’ 하는 내용이었다. 200년이 지난 오늘날 마침 내가 이 고을에 관찰사로 부임하여 그가 쓴 <운곡집>이라고 쓴 시집을 얻어 내었는데 기록한 시가 많지 않고 또 그 동안에 듣던 소문과 다른 점이 많았으나 요약해 보면 특기할 만한 내용은 가지고 있었다.…』
그 후 1630년에 발간한 신흠申欽선생의 문집 <상촌집>에도 앞의 내용과 비슷한 말을 쓰고 운곡선생의 시를 여러 수 들었는데 그분 역시 뜻이 잘 통하지 않는다고 하고 시구를 여러 군데 고쳐놓았다. 곧 앞의 일화와 같이 우왕 창왕이 왕씨 자손이라는 관점에서 글을 끌고 갈려고 글자를 바꾸어 보았으나 뜻이 연결이 안 된다는 말일 것이다.
이러한 운곡선생의 일화는 시집에 나타난 사실과 괴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증폭되어 33년 뒤인 현종 4년(1663년) 강원도 진사 한용명韓用明 등이 상소를 올려 이조 개국 후에 태종대왕께서 잠저시潛邸時에 운곡선생에게 글을 배웠으므로 등극후 어가를 몰아 운곡선생을 찾아 갔으나 만나지 못하였는데 태종이 머물 던 장소가 태종대太宗臺라는 명칭으로 내려오므로 원주의 유생들이 원주 칠봉산 아래 칠봉서원을 지었는데 서원의 사액賜額을 내려 달라고 한 사실이 실록에 실렸다. 또 숙종29년(1703년)에는 직제학 원호元昊를 원천석의 사당에 합향하라는 교지가 내린 사실이 실록에 전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여러 과정과 제문 배향配享 등의 사실을 <운곡시사>와 한데 엮어 정조 24년(1800년) <운곡행록耘谷行錄>이 발간된다.
그래서 나는 ‘진신서불여무서盡信書不如無書’라고 한 맹자孟子의 말이 생각난다. 우리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이렇게 정사와 야사가 혼동되어 마침내 정사처럼 굳어지는 경우를 많이 발견한다. 예로 들어보면 저 진주 기생 논개論介에 대하여서는 유몽인 선생이 쓴 <어우야담>에 처음 등장하고 실록이나 역사에는 없는 인물이나 지금 사람들에게는 실존인물이 아니라고 하면 도로 이상할 정도로 사실화 되었다.
그럼 여기서 번역원에서 번역한 <상촌집>에 실린 원천석 선생 시 인용부분을 여기에 인용하여 문제되는 점만 풀어보겠다.
『원천석(元天錫)은 고려 사람이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벼슬하지 않고 원주(原州)에 살면서 목은(牧隱)과 그 밖의 여러 노인들과 서로 왕래하였다. 그의 유고(遺稿) 속에서 후세에서 알지 못하는 당시의 사적을 직필(直筆)로 기록해 놓은 것이 있으니, 신우(辛禑)를 공민왕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그 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것이다. 그때 원천석은, ‘주상전하(主上殿下)께서 강화(江華)로 옮겨 가고, 원자(元子)가 즉위했다는 말을 듣고 느낌이 있어서. 라는 제목으로 두어 수를 지었으니,
성현이 서로 만나 당시에 바뀌니 / 聖賢相遇遞當時
천운이 돌고 도는 것 이제부터 알겠구나 / 天運循環自此知
야인이라고 어찌 나라 걱정 없으리 / 田畝豈無憂國意
다시금 충성된 마음 안고 안위를 생각하네 / 更彈忠懇念安危
하였고, 또,
새 임금 나오고 옛 임금 옮겨 가니 / 新主臨朝舊主遷
쓸쓸한 바다 고을 바람과 연기뿐이로세 / 蕭條海郡但風煙
천관의 바른 길을 누가 열고 닫는가 / 天關正路誰開閉
밝고 밝은 전감이 눈앞에 있음을 알아야지 / 要見明明鑑在前
하였다. 』
*이 시에서 우왕이 신씨의 자식인지 왕씨 자식인지 낌새를 알만한 내용은 단 한자도 없다. 그 저 첫째 연은 어진 왕과 훌륭한 신하가 만나 이렇게 구주가 떠나게 된 것을 서술하였고, 둘째 연은 작자가 백성으로서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을 적었으며, 셋째 연은 새 임금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바닷가로 떠난 처량한 모습을 그렸고, 넷째 연은 바른 길로 통하는 문은 하늘이 열고 닫으니 그 앞날을 알려면 앞 시대의 역사의 교훈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여기서 본인 생각으로는 그래도 한 나라의 임금이 교체되는데 아무리 부자간의 교체라 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세력에 의하여 나고 드는 것을 마치 여관에 숙박한 나그네가 다음 손님에게 방을 내어 주고 떠나는 듯한 가벼운 느낌으로 적었으니 아마도 당시의 상황은 이성계일파에게로 넘어간다는 사실을 예견하고 또 그것을 당연시 한 듯한 느낌이 든다. 또 구주가 신씨라고 쫓아냈다면 그 아들 신주는 신씨가 아니라는 말인가?
그리고 이글에서 주목할 구절은 첫째 ‘聖賢相遇’이다. 여기서 성현은 우리 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훌륭한 사람으로 보아서는 아니 된다. 성스러운 군주와 훌륭한 신하가 서로 만나 한 시대를 교체 시켰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성은 신주新主이고 현은 당시 신주를 옹립한 재상 곧 이성계일당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다음은 ‘天關正路’ 이다. 관關은 문이라는 뜻과 빗장 곧 자물쇠라는 뜻이 있으니 ‘정로로 통하는 문을 누가 열고닫을 것인가?’ 라는 뜻이 된다. 여기서도 은연 중에 왕씨의 기운이 쇠퇴하였으니 새 기운이 들어올 정로를 역사의 거울로 살펴보라는 뜻이 될 것이다.
이밖에 도통사 최영崔瑩 장군의 죽음에 대한 시는 최영장군의 충절을 애석히 여긴 것이고 목은선생의 귀양에 대한 시도 사우師友의 피참被讒을 안타까이 생각한 것이지 왕씨 고려에 대한 특이한 뜻이 부여된 것은 없다. 참고로 목은보다 운곡이 두 살 적다. 그러나 목은은 아주 일찍 벼슬길에 들어 섰으므로 운곡이 매우 존경한 듯하다.
그리고 우왕창왕의 폐위와 죽음에 대하여서는 본인이 지난 번 <운곡선생시 몇편>에 문제점까지 제시하였으니 새삼 더 말할 게 없다.
마지막으로 상촌선생의 결론적인 말을 아래에 인용하여 보았다.
『시(詩)의 어조는 비록 질박하여 말이 안 되는 곳이 많지만 사실을 바르게 쓰고 숨기지 않았으니, 정인지의 《고려사(高麗史)》에 비교하면 일성(日星)과 무지개처럼 현격하게 달라서 읽으면 눈물이 몇 줄 흘러내린다. 대개 고려가 망한 것은 무진년(1388년) 폐주(廢主)로 말미암은 것이다. 목은(牧隱) 같은 이들이 그래도 일맥(一脈)을 유지하여 공의(公議)가 아주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 정도전ㆍ윤소종의 무리들이 왕씨(王氏)가 아니라고 하는 자는 충신이 되고, 왕씨라고 말하는 자는 역적이 된다는 말을 만들어서 조정에서 떠들어 인심을 현혹시켜 드디어 선비들을 죽이고 사람들의 입을 막아 겨우 5년 만에 나라가 망했다. 그러니 그 시대에 태어나서 정직하게 자기의 주장을 세운 자는 그 생활의 괴로움이 어떠했겠는가. 그러나 인심을 다 현혹시키지는 못하고 사람의 입을 다 막지는 못해서 시골구석에도 이처럼 두려워하지 않고 바르게 쓰는 동호(董狐) 같은 직필이 있었으니, 어찌 돌이 누르면 죽순이 비스듬히 나온다는 것이 아니리오.』
---윗글의 원문---
‘詩語雖質朴多不成語。而事則直書無隱。比之麟趾之麗史。不啻日星螮蝀之相懸。讀之淚數行下。大抵麗之亡。由於戊辰之廢主。廢主之後。如牧隱儕流尙存。一脈公議未泯。故其時道傳,紹宗等輩倡爲非王氏者爲忠。謂王氏者爲逆之論。簧鼓朝廷。眩惑人心。遂得以魚肉士流。箝制口舌。僅五年而國亡矣。生乎其時而正直自樹者。其爲生辛苦顚沛當如何也。然而人心未盡眩。人口未盡箝。草野之間。有此董狐之筆。豈非石壓筍斜出者耶’。
본인은 이 글을 보면서 지난 이씨 조선의 당파싸움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진지 않았을까? 또 수백 년 동안 논난論難되어온 주자학의 이기론理氣論도 이런 것이 아닐까? 누가 ‘이기일원理氣一元’을 주장하면 그 추종자는 모두 그 이론이 맞다고 하고, ‘이기이원理氣二元’을 주장하면 그 반대 학자는 그 합리성을 따지기 전에 선입견先入見을 가지고 반대하게 된다. 한유韓愈가 말한 바와 같이 ‘기욕문인의도덕지설, 숙종이청지其欲聞仁義道德之說, 孰從而聽之 : 아무리 인의와 도덕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려고 하나 누구를 따라 뜯겠는가?’와 같이 되어 반대자는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까지 몰리게 되었다. 한 마디로 말하여 ‘우리 선생님이 그렇게 말하였는데 누가 감히 반대를 해.’하는 식이 당파싸움의 본질이 된 것이다.
여기 운곡선생 이야기는 앞서 학자들이 우왕 창왕을 신돈의 자손이라고 하여 죽인데 대하여 새 왕조 곧 이씨조선 개국의 부당성을 고발하였다고 몰아갔었는데 어느 시기에 갑자기 이씨 조선개국의 중추역을 한 태종의 스승이 되어 서원까지 세우게 되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과연 그 진실을 ‘숙종이청지’ 해야 할까? 새삼 한유의 다음 말이 생각난다.
“佛者曰, 孔子吾師之弟子也, 爲孔子者, 習聞其說, 樂其誕而自小也, 亦曰, 吾師亦嘗云爾,”
본인은 운곡선생의 행적을 상고하다가 문득 광문의 신드롬이 생각나서 여기 끌어들였는데 혹시라도 지나치다고 생각하면 망팔望八 늙은이 노망이 나서 헛소리한다고 생각하고 웃어넘기십시오. 그런 중에 작은 건더기라도 하나 건졌다고 하면 더욱 좋고 …
북한산 노적봉

# by | 2009/10/28 20:28 | 고인들의 시화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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